아는 여동생이 설에 해 준 얘기다.
때는 십 수년전 동생이 새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의관인 새 신랑을 따라 고향인 부산을 멀리 두고 속초로까지 가서 살았다. 자그마하고 허름한 군인용 관사지만 창틀이랑 문에 하얀색 페인트도 칠하고 소꼽 장난감같은 밝은 색 메이플 가구들로 꾸며 놓았다. 그 때 내가 아홉시간을 차로 달려 도착 해 구경했던 동생네 집은 백설공주가 살던 난쟁이들의 집같다... 라는 것이 내 소감이었다.
그 때 부쩍 마른 모습에 놀라 어디 아프냐고 물었던 것도 기억난다. 자랑스레 대답하던 동생의 답변도 -
아니, 다이어트했는데 성공한 거야.
요즘 제빵기에 빵 구워 밥대신 먹는데 기름이랑 설탕이랑 아주 적게 넣어서 굽거든 -
여긴 워낙 깡촌이라 빵가게가려면 한참 나가야 되걸랑. 그래서 제빵기로 직접 구워 먹는데 밥대신 먹으니까 양식도 덜 들고 아주 좋아~
그러던 어느 날 부산 시댁에 제사가 있어 동생만 내려 오게 되었다. 한번 내려오기 힘든 거리인지라 내려 오는 김에 친정도 들르고 친구도 만나고 그렇게 열흘 이상을 머무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신혼의 살뜰함이 남아 있을 때라 열흘이나 휑한 관사에 신랑을 남겨 두고 떠나올 생각에 동생은 무척 미안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이벤트 - 라는 것을 해 주자~!!! 라는 결심을 했다.
노란 포스트 잇을 방 구석구석 벽마다 붙였다. 들어 오는 입구에 1번 포스트 잇을 붙였다.
1번 - 제빵기 안을 열어보세요 -
제빵기 뚜껑 위에는 다음 포스트 잇을 붙였다.
2번 - 따끈한 빵에 놀라셨나요? 냉장고 문을 열어보세요 -
냉장고 문으로 가면 3번이 붙어 있도록 준비 -
3번 - 냉장고 안에 불고기를 절여 둔 게 있어요 - 구워 먹구요 -
그리고 밥솥 위에는 4번 포스트잇 - 따뜻한 밥과 함께 먹어요~~~
방 곳곳마다 포스트 잇을 적어 붙이고 행복해 할 신랑의 얼굴을 떠 올리니 미안함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함에 잠긴 것은 이벤트를 하는 자 만의 것이었나보다.
여행가방을 싸는 일이 익숙치 않아서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린 탓도 있었을 것이다. 포스트 잇을 붙이기만 했는데 출발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짐 다 챙기고 포스트 잇 붙이고 조금 행복해하기만 했는데 출발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관사에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나가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하니 터미널가는 시내 버스도 쉽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분마다 한 대씩 오는 지 알 수 없으니 지체할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누가 걷어차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대문 밖으로 튕겨 나가듯 다다다 (=3 =3 =3 ) 하며 달려 나가버렸다.
포스트 잇?
떼지도 못했다.
버스 놓치면 그 다음 버스는 한참 뒤에 출발할 것이고 그러면 한밤이 되어야 도착하게 될 것이고 제사 준비를 돕기는 커녕 제사 지내고 있는 도중에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 - - - - 그리하야 - - -
출발하고 난 후 저녁이 되어 신랑이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부하 장병들 두 명과 함께 집으로 들어 섰다.
엇, 여기 무슨 포스트 잇 하나가 붙어 있는데요?
와... 역시 신혼이라 다르군요. 형수님이 뭘 준비해 놓고 가신 모양인데요?
셋은 벙실거리며 제빵기로 달려가 뚜껑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싸늘했다.
음???
2번에 냉장고 열어보라는데? 냉장고 열어 보니 - 거기도 아무 것도 없었다.
3번의 밥솥 - 역시 텅텅 ~~~~~
집안 곳곳을 노랗게 덮고 있던 포스트 잇의 메세지들이 허망하게 떨어졌다.
많기도 많지 - 집안 가득 노란 것이 무슨 타이 어 옐로 리본 라운드 디 올드 오크 트리 같았다. 팔락팔락~~ 흔드는 수많은 손들 -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랑보다 오히려 더 민망해하던 부하 장병들. 머쓱해하며 돌아가고 -
핸드폰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라 밤늦게 도착한 동생과 신랑은 통화를 나누었다.
그거 왜 붙여 놓은거야?
응..... 할려구 했는데 ;;;
그럼 떼구 가든가 -
응... 그럴려구 했는데 ;;;
한 번의 실수는 오래도록 만인의 즐거움이 되나니 -
열흘간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에도 한참동안 그 노란 포스트 잇 이벤트의 뒷 이야기는 계속 되었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또 이렇게 회자되고 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대서 이야기를 못 이을 정도의 유쾌함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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