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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바디 랭귀지의 신비로운 세계를 체험하다





때는 지난 주말이다.

아침 일찌기 도착한 울산 KTX 역내의 모습 -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위 사진 속 모습을 보고 '다섯 손가락'의 어떠한 노래가 떠오른다면 어쩜 당신은 나랑 조금 통하는 데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곳 울산에서 서울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 10여분 남짓. 촉촉한 아침 공기, 레일 사이 바닥은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혼자 먼 길을 떠나는 나는  쿠션감이 좋은 플랫 구두를 신고  조금 짧지만 편한 스커트를 입었다. 빗물이 묻은 우산을 탈탈 털어 숄더 가방의 포켓에 꽂았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처럼 혼자 길을 떠나는 이들, 둘 셋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의 수트차림 남자들, 큰 트렁크 가방을 어깨에 매거나 하드캐리어를 옆에 세워 두거나 한 모습들, 각양각색이다. 위 사진을 찍고 3분 뒤 기차가 굉음을 내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날리고 나는 순간 눈을 감아 버렸다.



 
올라갈 때도 중국인 가족 여행객이 보였다. 한국인과는 조금은 다른 의상의 느낌, 헤어스타일, 낯선 눈길로 주변을 둘러 보는 모습에서 중국인 관광객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다 확신을 가지게 된 건 옆을 지날 때 들리는 쑤알라~띵호와~밍맹하우~ ;;;

마침내 내려오던 길 내 옆자리에 중국인 가족 여행객중 아버지되시는 분이 내 옆에 앉게 되었다. 머리 윗 부분을 직선으로 깎아낸 듯한 사각 스포츠 헤어이다. 그리고  덩치가 좋다. 음... 한 마디로 말하면 강호동 스타일 되시겠다.

5분쯤 앉아 있다가 건너편의 부인되는 분과 자리를 바꿔버렸다. 그리고는 그 옆자리 아들로 보이는 아이와 아이패드로 같이 게임을 시작했다.

자리를 바꾼 이유 추정

  • 본인 덩치가 크므로 낯모르는 여성과 부딪치는 게 신경쓰여서
  • 예쁜 여성과 앉아 있기엔 옆 자리의 부인에게 눈치보이니까
  • 아들이 게임을 같이 하자고 쑬라 쏼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요청했을 수 있다.

두번째 이유가 조금 강력하게 밀려오지만 ;; 남편에게 얘기하니 가배얍게 흥~ 하고 코웃음친다. 아들을 부인에게 미뤄두고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가족 옆이 제일 편한 마지막 보루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현장이었다고나 할까....??




난 독서등을 켠 채 KTX 잡지를 읽고 있었다.  다양한 사진 구도, 다양한 여행기의 포커스, 편집 방법, 사진들의 배치등에 감탄하며 읽어 나가다가 옆 자리를 보았다. 한자가 빼곡한 지도를 펼쳐 보고 있었다. 독서등도 켜지 않은 채 깨알같은 글씨의 지도를 눈에 불을 켜며 보고 있었다.

턴 온 더 라잇? 불... 켜 드릴까요?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지 어리둥절한 표정. 벌떡 일어나 독서등을 켜고 방향을 조절해 주었다. 금새 번지는 미소. 어눌한 "고맙습니다"의 화답.

한국어도 익숙하지 않고 영어도 익숙하지 않은 걸 보니 문득 걱정이 되었다. 혹 목적지를 모르고 지나치지나 않을까 하는.
핸드폰에 뭔가가 있던 것 같아서 만지작거리니 중국어 회화부분 파트에 여행중에 쓰이는 문장들이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가 보였다. 오, 예스~!!!

기차 안에서는 조용해야 하므로 음성버튼은 누르지 않고 중국어 글자만 나타나게 한 뒤 부인에게 보여주었다. 익숙한 글자에 입이 벙긋하더니 대답을 해 주었다.

둥.. .대구 -
 동-대-구-?
예스, 예스~!!! 동대구~!!!

아.. 동대구.. 동대구 되면 말해줘야지... 가만 보니 뒤적거리는 그 지도의 한켠에 크게 한자로 '동대구'라고 적혀있다. 자유여행인가보다. 대단하네...

그리고 한동안 침묵...
별 할 얘기가 없으니 이건 당연한 일.

둘 다 물끄러미 복도 위 TV를 올려다 보았다. 김수홍의 요리교실이 나오고 있었다. 누드김밥과 주먹밥 만들기가 나왔다. 봄철을 맞아서 피크닉용 도시락 만들기가 아닐까 싶었다. 옆 자리 부인이 점점 집중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평소 하던 노말김밥이 아니라 흥미롭게 지켜 보았다. 한번 주욱 훑어 요리하기가 끝난 뒤 빠른 속도로 전체 순서를 점검하는 영상이 지나가자 부인이 복도 건너편 남편되는 분께 뭐라고 얘기를 했다. 손가락으로는 영상을 가리키며 - 남편되는 분도 같이 영상을 보았다. 이 사람들이 저게 먹고 싶은걸까? 저건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요리는 아닌데...


런치 박스 포 피크닉 - (Lunchbox for picnic) .

주어 동사 다 빼고 아주 간단한 단어로만 얘기했는데도 못 알아 듣는다. 이건 절대 내 발음상의 문제가 아니다. 결단코 -

부인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더니 마침내 내 앞에 펼쳐주었다. 전자사전이었다. 나에게 한글로 찍어보란다. 그러면 중국어로 번역이 되어 나올 듯.
도시락을 찾아 누르니 뭔가 중국어가 나오고 '아항~!!!' 감탄어가 대답이 되었다.

아이 러브 잇 -

음... 어떤 영어는 할 줄 아네?? ;;; 스피킹은 되는데 리스닝이 안되는 건가...?

부인은 무언가를 타이핑하더니 내게 보여주는데 거기 한글로 '경복궁'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 워즈 인 서울 포 5 데이즈. 아이 고 경복궁 -

아하~!!! 올도우 아이 엠 코리안, 아이 해븐트 빈 데얼. 경복궁. (가슴 앞에서 손으로 엑스자 표시를 하는 게 중요, 고개도 절레절레 )

오오~!! 신기해하면서 복도 옆 남편에게 말을 전한다. 이 사람, 한국사람인데도 거기 안 가 봤대요. 하하하~~
뭐.. 나는 괜찮다. 나로 인해 당신이 거길 다녀온 데 대해 뿌듯해 할 수 있다면 - ㅡ.ㅡ;;

또 침묵... 텔레비전에선 강풍으로 지붕이 날라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비행기도 못 떴단다. 이 분들 바람때문에 기차를 타고 가는 건가?

스트롱 윈드 -  ??
눈치를 보니 못 알아 듣는다. 전자 사전을 내밀어 주길래 '강풍 주의보'라고 두드려봤지만 그런 단어는 없나보다. 난감한 표정으로 있다가 특단의 행동.

휘파람을 불고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회오리바람표시를 만들어 주었다.

휘이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


눈은 45도 오른쪽 위, 창 밖으로 향해 튀어 나갈려는 시선, 손가락을 뱅글뱅글, 휘이이이이~~~~

하면서도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이이이~~~뱅글뱅글~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알아 듣고는 부인이 막 손뼉을 친다. 아하~~ 아하~~~ 예스, 예스~~

그래서, 뭐... 난 뭘 묻고 싶었던 거지.. 바람이 부는데 뭐? 어쩌라고 - ;;

또 침묵..........................................

부인이 다시 전자 사전을 펼쳤다. "한국인" , "조용한, 점잖은"

아항.. ^ ^

또 두드린다. "예의가 바른"

아항. 땡큐 ^ ^

또 두드린다. " 어린 소녀들 "

음... 예쁘다는 얘기?

"맵시가 좋은, 스타일이 좋은 "

빙고~!!

또 두드린다.

" 얼굴이 예쁜~"

하핫 ^ ^   기차 안의 여자분들을 슥 훑어 보았다. 정말? 음... 사실이네. 다 예쁘네.

동-대-구- 해-장-국-먹-꼬-시-포-요-
동대구가서 해장국을 먹고 싶다고? 그걸 먹을려고 중국에서 여기까지 왔나? 아... 가만...

웨얼 아 유 프롬? 차이나? 오얼.... 타이완?


아.. 차이나. 상하이.


오케이... 웨잇 어 모먼트....


KTX 이번 호 안에서 선지국과 해장국만 40년간 해 온 할머니 이야기가 있던 걸 기억해내고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이게 해장국. 이 할머니 40년간 이걸 만들었어요.

디스 워먼 메이드 잇 포 포티 이얼스.

오오~!!!!!!!

디스 이즈 베리 칩. 칩 푸드. 온리 6000~7000 원.

뭔가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었는 듯. 오해를? 급히 덧붙인다. 베리 딜리셔스~!!!
얼핏 봐도 지도가 아주 많은데 그 사이로 대구시에서 배포한 듯 한 게 보였다. 표지에 적힌 글자, MEDICAL TOUR -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후 니드 하스피털?


오. 노 -
대구시 차원에서 이런 홍보물들이 건너 간 듯 - 적극성에 감탄, 대단 -

이틀을 더 머물다가 돌아간다는 대답도 들었고 나도 곧 상하이에 한번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잘못 알아 먹고는 내 남편이 상하이에 살고 있냐고 되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한 뒤 조금 더 설명하려 했으나 언어의 장벽으로 포기했다. 이건 휘이이이~~ 휘파람 소리와 빙빙 돌리는 손가락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고차원의 난제다.

한국소녀가 예쁘다고 할 때도 내게 직접 하는 칭찬이 아니니 고맙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방긋방긋 웃는 액션밖엔 할 게 없었고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할 때도 언어로 전달되는 부분이 부족하다 보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최대한 그걸 커버하고자 온화한 표정을 지어야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내 안의 모든 걸 끄집어 내는 표정과 액션 연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은 흘러 동대구가 가까와졌다.

핸드폰 사전을 뒤적거려 마침내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아내고는 보여주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행운을 빌어요 -
부인이 전자사전을 두드리더니 내게 보여준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중국판 강호동 아버지께서도 내리면서 잠깐 내 쪽을 향해 목례를 건넸다. 그 아버지의 판박이 미니형 아들도 내 쪽을 보더니 쭈삣쭈삣 뭔가 액션을 취하려다 포기하고 뒤따라 갔다.

집에 도착해 뉴스란을 검색하다가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떤 이유로? 일본 쪽으로 가려던 관광객들이 이리로 빠진 것?

2시간 가량 오버된 표정과 바디 랭귀지로 대화를 나누었던 신비한 체험을 아들에게 얘기해주었더니 재미있어 죽을려고 한다. 특히 휘이이이이이~~에서 -
그건 다시 생각해도 이전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을 신기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한다.


 

챙길 것이 많은 5월이네요. 다들 무사히, 즐겁게 오월 보내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