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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블로그가 만나게 한 신기한 인연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인연과 마주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 챗창에서 자주 만나 히히덕거리던 그 사람이 바로 옆 경쟁 가게 주인이라는 걸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될 때도 있는 거죠. (영화 '유브 갓 메일') 혹은 어린 시절 혼자 짝사랑하던 여인에게서 어느 날 문득 편지를 받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그녀의 옛 연인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십수년이 지난 후의 그녀를 다시 보게 될 행운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영화 '러브레터')

넓은 세상 바닷가 모래알만큼 흩어져 있는 우리들은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요? 어제까지 저 쪽 세상에서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을 오늘 내가 어떻게 인사를 건네고 악수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 내가 바닷가에서 주운 유리병. 그리고 그 안에 넣어져 있던 편지. 누구의 사연일까 궁금해하며 흘려 읽었는데 수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편지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절경은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 박일규 시집이라고 적혀 있군요. 이 책은 제가 산 것이 아닙니다. 소포로 배달되어져 온 것입니다. 그것도 저자에게서 직접. 저 분과 나는 이 책을 받기 전까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저 분에게서 리뷰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 책을 받은 걸까요? 아닙니다. ^ ^

신기했던 인연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이제부터 말해 드리겠습니다.




때는 2010년 6월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울산에서는 태화 물축제가 열리고 있었죠.  저는 태화강이 내려다 보이는 인근 산으로 산책을 올라갔습니다.



이 쪽, 저 쪽 많이 찍었습니다.




당시 행사장의 간이 천막이 저기 보이는군요.
그 날 사진을 많이 찍어 포스팅을 꼼꼼히 했었습니다. 내려 오는 길에 보이던 사진전의 풍경도 담았죠. 그리고 하산길에 보이던 약수터 풍경도 담았었어요.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대형 분수대가 하나 보였습니다.




육지 안의 하천이 끝나는 지점에 대형 분수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갔었던 그 때는 분수가 작동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작동도 않는 분수를 보며 분수 놀이가 끝난 물은 어디로 빠져 나가는 걸까 ? 하릴없이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시(詩) 한 수가 적힌 게시판이  보였습니다.



시민들의 산책로에 가끔 보이는 시(詩) 게시판이었습니다. 분수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앞이라 그런지 시의 제목이 분수였습니다.

그 때 제가 포스팅한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 전략)
.
.

박일규 시인의 '분수'라는 시였어요.

중간의 네모 칸 안에 어떤 시어가 들어가는지 한번 맞춰 보세요 .


분수


저 드높은 하늘엔들 어찌 부끄럼이 없겠는가

우주의 맑고 짙푸른
그곳을 위해

□□의 물줄기가
분연히 치솟아 오른다



정답은 더보기 안에 있어요.
발상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보고 웃었답니다.






저 시를 본 뒤 5분 이상은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계속 깔깔거리며 "재밌지 않아? 정말 기발하다, 그치?" 를 연발했습니다. 그토록 기억에 남았으니 하루가 지나 포스팅할 때까지도 생각이 난 거겠죠.

그렇게 포스팅을 하고 난 뒤 석 달 가량이 지났습니다. '박일규'라는 닉으로 댓글을 단 분이 있었습니다.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건 아닌데 그래도 깜짝 놀랐습니다.

진짜 '박일규'님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



그럼 거짓 박일규도 있나요? 라고 하셨어요.


따님이 우연히 아버님 이름으로 검색하다가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등산길에 우연히 읽었던 시의 지은이와 직접 맞닥뜨린 저도 놀랐었지만, 세상에 흩뿌려 놓았던 수많은 자식같은 시 들 중 하나를 다시 만난 그 분도 놀랐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 제 생각이지만 - 자신의 그 시가 울산의 등산로 게시판에 적혀져 있다는 사실마저도 살면서 잊어 버리진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으신지 용감하게도 그 분이 공개 댓글로 핸드폰번호를 떡 하니 적어 놓으셨습니다. 놀래서 비밀 댓글로 제가 다시 적고는 그 글을 삭제했습니다. 전번을 남겨 놓으신 데 대해 그냥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반갑고 인사 건네 주셔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주소를 적어 달라는 답신이 왔습니다.

본인은 본인이 박일규님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100 % 확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다 저같이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 머뭇머뭇 답신을 망설이는 사이에 다시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주소를 왜 안 보내냐는 버럭 호통 - 은 아니고 그저 채근 - 도 아니고 단지 부탁 - ^ ^

그리고 나서 나는 모든 걸 포기하는 마음으로 주소를 보냈습니다. 정말로 '박일규 시인'이 맞기를 바라고 주소가 다른 쪽으로 나쁘게 악용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요.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제일 윗 사진으로 보여드렸던 시집이 한 권 들어 있었습니다.


환하게 웃는 얼굴 컷도 앞 장에 하나 들어 있군요. 산책로에서 읽었던 시의 지은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남편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전에 내가 읽어 줬던 그 시 있지? 그 시 저자분이셔. 직접 책을 보내오셨다고 -

놀라운 인연, 신비한 인연 -

언제인지 모를 과거의 어느 시간, 한 시인이 던져 산 모퉁이 흙길 아래 굴러 다니던 것을 내가 줏었습니다. 그 줏은 것을 다시 돌돌 뭉쳐 내가 세상에 또 되던졌습니다. 내가 되던진 그것, 세상 바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던 그것을 맨 처음의 주인이 다시 되잡았습니다. 그리하여 - 마침내 - 떠다니던 주인없던 무형의 인연이 이렇게 떡 하니 '책' 이라는 현물(現物)로 내 손에 잡히는 것이 되어 눈 앞에 있습니다.



시집 안의 시들은 각각의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건 같은 시인이 적은 것 같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머가 느껴지기도 하나 숨겨진 슬픔도 알아 챌 수 있습니다. 시 2 편만 소개하며 글 맺겠습니다.

초승달

다 보여 줄게 보여 줄게 하면서도
앞 단추 하나 풀지 않던

밀쳐내며 자꾸 밀쳐내며
젖으며, 달아오르며 숨이 막히던



 

17평 임대 아파트

그대 사과꽃 비린 입술
생각만 해도 설레었지
어스름 속 풀벌레 소리는 묵었어도
우린 언제나 처음이었지

글고 온 세월 내내 오롯했던 가난의
꿈덩이들 낳으며

문간방에선 대학생 조카아이가
안방에선 잠 밭으신 어머니가 큰놈과
작은놈과 고명딸은 거실에서
당신이 품고 자고

여보, 난 어디서 자. 응?
오늘 밤 엘랑 두근두근
기어서 곁으로 가고 싶은데

부쩍 자라 버린 아이들 덕분에
함께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꿈속에서 곱게 단풍 들고 있는
내 여자


검색하니까 보이네요. 혹 시집에 관심있는 분은 여기 들어가 보세요. 소제목들 보시고 관심가시면 사서 읽어보시길.

절경은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 - 10점
박일규 지음


해당 포스팅이 궁금하신 분을 위해 링크도 하나 남겨 드리겠습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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