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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소설 속 '사포'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여인 -


 근래에  책을 한번에 끝장을 내도록 읽어 내린 적이 없었다. 읽다 덮다를 반복하며 지지부진하다가 마침내 반도 못 읽고는 덮어 버린 책들이 훨씬 많았다.

알퐁스 도데의 '사포'를 - 내가 읽은 '김종태' 번역 산하출판사의 제목은 '꿈꾸는 사포'이다 -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완독해 버린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겠다. 정통 통속극의 구조와 전개를 가졌다는 것, 담백하게 풀어가는 문체, 그리고 여주인공 사포의 매력때문이라 생각된다. 

# 담백한 서술

알퐁스 도데는 유럽 쪽 작가이면서도 스토리 위주의 전개를 한다.  인물의 심리 묘사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깊이 묘사하지 않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마침 알퐁스 도데 단편 중 하나인 '아를르의 여인' 완판을 직접 타이핑한 것이 있어 링크한다. ) 영미쪽 작가들과는 달리 유럽쪽 소설들은 철학서의 면모를 조금씩 띄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알퐁스 도데는 매 장면과 대사들을 스케치하듯 담담하게 그려낸다. 절대 작가의 관점을 과도하게 집어 넣지 않는다. 1인칭 시점이긴 한데 주인공의 심리 마저도 여백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독자의 경험과 상상에 뛰어 놀 여지를 주는 것이리라.

한 예를 들어 주인공인 장이 아버지에게 약혼녀와의 결혼이 깨진 이유가 화니- 본명은 화니이고 그녀의 별명이 사포, (Sapho) -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아버지의 반응을 보자. 외교관 출신이며 엄격한 장의 아버지는 당연히 화를 내었는데 그에 대한 묘사는 단 두 줄이다. 아니, 대사를 합하면 조금 더 길다.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의 파란 불꽃이 이는 눈초리를 받으며 계속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것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끔찍한 일이었다. (중략... 장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느낌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 이윽고 아버지는 증오와 저주가 담긴 말들을 왁왁 토악질하듯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젠 이집에 한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

" 가거라, 네 맘대로 그 매춘부와 함게 떠나가란 말이다. 넌 이제 죽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다!"


이러고는 그냥 끝났다. 화니와의 사랑이 장에 있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했나 설명하려면 이 부분을 조금 더 극적으로 그릴 법도 하나, 이러고는 그냥 끝이다.

화니와의 사랑은 가족과의 이별도 뜻했는데 배를 타고 떠나기로 한 항구에서 그녀를 기다렸으나 으레 이런 이야기의 끝이 그러하듯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한 장의 편지만을 받아들게 된다.

이 소설은 통속극의 다양한 장치들을 담뿍 담고 있는데 그들의 첫 만남부터가 그러하다.


# 통속극의 얼개

첫 만남 -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걸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사포 역으로는 어떤 여배우가 어울릴까? 장의 역할로는? 화려했던 가장 무도회는 어떤 분위기로 영상화가 될까?

그들은 한 저명한 예술가가 자택에서 연 가장 무도회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화니는 이집트의 농군 차림을 하고 있었고 장은 목동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나이가 감추어진 채 그들 자신으로서만 만났던 것이다. 이건 완벽하게 드라마틱한 만남이다. 다른 누군가의 소개가 없이 우연히 인사를 나눈 그들은 서로의 나이도 몰랐고 직업도 몰랐다. 던지듯 부유하는 몇 마디의 대화로써 서로는 이미지로써만 기억되었던 것이다.

이후 장의 자취방을 화니가 찾아오는 것이 반복되고 마침내 둘의 동거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화니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게 된다.

그 때까지 장의 눈에 비친 화니의 모습.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 얼굴에 대한 묘사보다도 어깨라인과 팔라인이 아름답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허리라인도.화니에게 영적인 부분보다도 육적인 매력이 강했다는 걸 설명하고 싶었나보다 -  툭툭 내뱉는 말 속에 대단한 예술적 안목이 엿보이며 사랑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여인이다. 장 또한 미남자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미소년이 환생했나 싶을 정도로 잘 생겼다. 거리를 다니면 여인들의 눈길을 흘낏 흘낏 받을 정도라고 책 속에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고향에서는 모두가 존경하는 매우 뼈대있는 가문의 청년이다. 이런 장이 그동안 고향에서 만나 왔던 여인들과는 비교가 안되리만큼 화니는 지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취향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잘 생긴 남자가 집안도 좋다. 엄격하신 아버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집 안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화니의 정체가 짐작이 간다. 둘이 비슷한 배경이면 소설 플롯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갈등이 생겨날 수가 없다.

화니는 술 주정뱅이 마차꾼의 딸이다. 어려서 버려졌고 남의 손에 길러졌다. 그리고 그녀가 여태 거쳐 온 남자들의 숫자는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이다. 좋게 말하면 당대 사교계의 꽃이었고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항상 누군가의 정부로 살아 왔던 여자이다. 이렇게나 살아 온 배경이 다른 이 두 남녀가 맺어진 데는 처음의 저 가장 무도회라는 배경이 유효했던 것이다.

통속극의 갖가지 장치들 -

극이라고 보더라도 너무 한 쪽이 기울어지면 재미가 없다. 저렇게나 화니의 편으로 봐서 불리하기만 한 저울대의 바란스는 어떻게 맞추어져 가는 걸까?

화니가 절세의 미녀라고는 해도 장 역시 절세미남이다. 외모에 있어서는 화니가 자신의 약점을 만회할만큼 장을 압도하지 못한다. 굳이 장점이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수많은 남자의 정부였던 화니, 그 상대남들이 모두 당대의 내노라하는 예술가들이었던 것. 유명한 조각가, 음악가, 작가 등등. 수많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기도 하고 사교계의 유명인이었던 그들이 모두 화니의 남자들이었다. 그들과 몇 년씩 동거를 했던 화니에게는 그들의 지식 쪼가리들과 소소한 습관들이 섞여들었다. 장이 화니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었던  지적이면서도 야릇한 감수성은 지나간 남자들의 자취였던 것.

조연들도 다양하다.

장의 입장에서 연적이라 할 수 있는 화니의 남자로는 예전에 화니를 위해 돈을 만들려고 사기를 치다 감옥에 간 가난한 예술가 까르망이 있다. 화니의 입장에서 연적이라 한다면 어느 명망있는 의사의 조카인 집안좋은 소녀. 그리고 화니가 오해를 가졌던 대상인 장의 형수.

또한 장과 화니가 쉽게 헤어질 수도 있었으나 이를 방해하게 되는 건 찌질한 역으로 나오는 작은 아버지 이다. 장에게 아무 영향도 못 끼치지만 '연약하고 보호해야만 하는, 뿌리칠 수 없는 가족들'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는 장의 어머니도 있다. 동거하고 있는 그들의 초라하지만 편안할 수도 있는 미래를 대변하는 이웃 부부들 등장한다.

#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포

화니에 대한 묘사, 화니가 하는 말과 행동들을 책을 따라 떠올리다 보면 실재하는 인물이 아닌가 할 정도로 생동감이 느껴진다. 내 주변의 모 여인과는 이런 부분이 비슷하고 또 다른 모 여인의 말도 안되었던 점이 어쩌면 화니의 성격일 수도 있겠다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대입하고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집에 장을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던 이유를 화니는 장에게 속삭인다. 바로 식탁 옆이 침대라서 곧바로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 - 이라고. 이런 화니가 어떤 여인으로 느껴지는가?  가난한 옆집 어린애, 아파서 떨고 있는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중 가장 비싼 쇼올을 망설임없이 건네 줄 정도로 동정심도 많다. 누구보다 귀부인처럼 꾸밀 줄 알고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으나 생활력도 강하다. 장이 돈이 부족한 걸 알게 되자 굴욕을 참고 거들먹거리는 부인의 비서로 일하기도 한다. 이런 고생을 사서 했던 이유는 오로지 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중고상점들을 찾아 다니며 싼 물건들만 잘도 골라내는 안목도 있다. 자신을 위해 감옥에 간 남자의 흉을 보는 장 앞에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안달이 난 장이 그 이유를 묻자, "그래도 나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의 나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신의도 보인다. 질투에 불타 오를 때는 이글거리지만 그것이 장의 앞날에 도움이 안되는 걸 깨달으면 이내 순한 양이 되어 버린다. 자신을 버린 장에게 화니는 빌고 또 빌고,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잠잠히 있다가 장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알아채면 또 그것에 감사해하고 끝없이 기다린다.

화니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팜므 파탈일까?

장의 앞날에 도움 될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팜므 파탈들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파멸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 화니는 오로지 장을 사랑하였으므로 장을 파멸시키게 되는 여인이었다.

통속극처럼 보이면서도 사포에서 문학의 높은 향기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먼저 알퐁스 도데의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겠지만 다른 하나는 인물들의 탈 정형성때문이겠다.

화니를 머릿 속으로 그려가다보면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들이 깨트려 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실체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고 표현하는 애티튜드도 완벽히 구현하고 있는 화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류사회 여성이다. 그러나 또한 천박함도 같이 갖고 있다. 화니는 지적인 여성일까, 천박한 여성일까?

이기적인 인물이라는 것과 희생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을까? 그 실체가 화니이다.

화니가 책 말미 부분에 가서 장의 뒷통수를 쳤다라고 할만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니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화니가 그 자신에게는 늘 솔직하면서도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는 때문이다.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에게 온갖 교육을 시키고 예술을 가르치고 때론 오페라 가수로 무대에 세우기도 했던 수많은 이전의 남자들. 그들은 화니의 새 애인과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제법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며 친분을 이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비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 ^

실은 읽는 내내 내가 그것이 궁금했다. 단순히 아름답고 천사이면서 요부인 양면성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되었다. 그녀가 진실되었기 때문에? 밤의 세계에 능수능란해서?

나는 그녀가 마지막 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언가를 찾아 보려했다. 그렇게나 자신을 모두 내던져 장을 잡게 된 그 때 그제서야 그를 놓아 주며 보냈던 편지, 그 안에 지나간 연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이 있으리라.

아래는 내가 요약한 "그녀의 떠날 수 없는 이유들" 이다.


1. 새로 시작하기에 난 젊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맹목적인 정열이 이젠 사라져버렸어요.
2.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감내할 만한 자신이 없어요. 낯선 곳에서 금방 쭈글쭈글 늙어버릴 거에요.끔찍해요.
3. 절대로 플라망 -다른 남자 - 때문은 아니에요. 단지 그의 아들때문이에요. 그 애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친아들은 아니나 정을 주다가 모성애를 느끼게 된 한 소년)
4.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주는 사랑에 지쳤어요.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5. 예전에 우리가 살던 그 집 앞에서 옛날 추억을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이 날 찾지 못하는 곳으로 영원히 숨어버릴거에요.
6. 영원한 사랑, 당신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보냅니다.

                               - 당신의 화니 르그랑



주 이유는 1번~4번이고 5번과 6번은 장을 달래는 말이다. 그리고 2번의 끔찍함이 얼마나 화니 본인에게는 엄청난 것인지 어린애처럼 상세하게 묘사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로 무섭단 말이에용~~ 이잉~~ " 이러는 화니의 표정이 보이는 듯 하다. 그리고 모든 이유들 사이에는 그녀의 고민과 번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성실하게 끼워져 있다. 또 얼마나 장을 사랑하는 지도. 그리고 혹여 플라망을 저주하게 될까 걱정해서 자신이 플라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열심히 설명한다. 그저 그 아들때문에 그와 붙어 있는 것이라고. 그래 놓고는 또 그게 완벽한 설명이 되지 못하므로 사랑받고 싶어서 플라망과 함께 떠난다는 말도 첨언하고 있다.


 내용으로 보면야 설득될 만한 논리적인 이유들로서는 조금 부족하다 싶다. 하지만, 문장들에 드러나는 화니의 마음이 어찌나 순수하면서도 절실한지 미워할 수 없는 어린애같다.

한동안 화니가 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을 듯 싶다.

# 화니와 장의 나이는?

이 책의 리뷰들을 몇 개 읽다가 화니의 나이에 관해 적어 놓은 것들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맨 처음 가장 무도회에서 누군가 장에게 나이를 묻는데 '스물 한 살' 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58페이지 (전체 276페이지중) 에서 옛 연인 데셀레뜨가 말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1853년에 열일곱살 이었고 지금은 1873년, 딱 이십년 전 일이라고.그러므로 화니는  현재 37살.

여기까지 보면 둘은 열여섯살 차이?

아니다. 81페이지에 다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장의 독백, ' 나보다 십오년이나 연상의 여자가 아닌가.'
 58페이지까지 가는 동안 장이 한 살 더 먹었나 보다.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 장이 외교관 시험을 통과하면서 세월이 1년 더 흘렀고 화니는 서른여덟정도로 마무리되는 듯 싶다. 그리고 장은 스물 셋. 장으로서는 불같은 청춘의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나저나 화니의 이미지에 딱 맞는 여배우로는 누가 있을까? 웃을 때 고른 치아가 환하게 보여야 하고 어깨가 동그라며 가슴과 허리의 굴곡이 아찔해야 한다. 지적이면서도 요부의 이미지도 있어야 하고. 스칼렛 요한슨.. 이라면 어떨까 싶은데? 소설 속에서는 팔 다리가 길어야 한다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