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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나들이

[베/캄 여행기18] 삼신할매 랜덤으로 그 땅에 태어난 아이들


캄보디아의 소녀들 

바라이 인공 호수에서 만난 그 아이들




바라이 인공호수에 왔다. 세계 최대 규모의 인공 호수란다. 그런데 - 사진이 2 장 밖에 없다. 사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사실 가이드 최부장께 설명을 들은 것도 그닥 없고 내내 심심하게 호수를 둘러보기만 했다. 그런데 사진 찍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답답해서 -

남북 길이 2km, 동서 길이 8km의 이 호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강바람같은 바람이 불고 시야 끝까지 출렁이는 물결인데 마음이 답답했다. 나갈 수 있는 마음의 통로가 보이질 않았다.

위대한 왕 수리야바르만 1세가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기 전에 이 곳을 먼저 건설했다. 공사장에서 쓰일 식수와 공업 용수 조달을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가 간 곳은 서 바라이 호수였고 이것과 똑같은 크기의 호수가 동, 서, 남, 북, 4 방향에 각각 다 있다. 지금은 현지인들의 해수욕장처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첫 유적지 관광을 갔던 곳이 앙코르 와트다. 그곳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가이드 최부장은 모든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당부 말이라면서 부탁을 해 왔다.

몇 년전부터 한국인들의 캄보디아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씨엠립에 구걸하는 거지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 곳의 일반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20달러이다. 그런데 구걸하는 걸인에게 1달러씩 후하게 준다는 한국 관광객들의 소문이 퍼지면서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 곳으로 원정을 오고 있다고 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이 곳에 보낸다. 젊은 새댁들은 옆 집의 갓난 아이를 빌려서 안고 다닌다. 갓난 아기를 안고 다니면 동냥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옆 집 아이 며칠 적선했더니 자기 집 남편 한달 월급을 벌어 오더라 - 이러면 다들 자기 집 아이, 학교를 보내지 않고 동냥하러 보낸다.

아이들의 교육은 그 나라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 가져가는 10달러 때문에 배워야 할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내일도 또 동냥을 하러 나오게 된다.
내가 주는 1달러로 한 아이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고 절대 적선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최부장.

보릿고개라는 걸 경험했던 60대 이상 어르신들 중에는 그 당부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단다. 저렇게 불쌍한 애들에게 어떻게 단돈 1달러를 안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라면서.

바라이 호수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녀들이 달라붙는다. 1달러 주세요, 1달러 -

혹은, 조잡하게 엮어 만든 색돌 팔찌를 팔기도 한다. 3개에 1달러. 재료를 살 필요도 없고 집에서 만들었겠지. 이걸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또 잠시 망설인다. 사 보았자 쓰지는 못할 물건이다. 집에 두기에도 조잡하다. 쓰레기통에 바로 들어갈 듯 싶다.

미안하다. 필요가 없어...


필요해-


I don't need it...


Fatal No~!!!! You need it~! 오늘 한 개도 못 팔았어. 난 1달러가 필요해.


이럴 수가.... 내가 한국말로 하니 한국말로 답하고 영어로 말을 하니 영어로 답을 한다. 생존에 필요한 외국어는 다 배웠나 보다.

멀리서 합창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해수욕장 휴게소같이 평상과 천장이 있는 곳으로 가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평상 위에 단체로 앉아 있고 캄보디아 소녀들이 스무명쯤 모여서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TV를 볼 기회도 없었을텐데 이 노래를 어디서 배웠을까? 누군가 가사를 적어주고 다들 모여서 연습을 했겠지. 이건 학교를 나가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보다 발전적일까? 팔찌를 만들어 파는 것보다 생산적일까?

강가에 내려 가자 소녀들이 달라붙었다. 원달러, 원달러 - 카메라를 꺼내려 가방을 열자 지갑을 꺼내는 줄 알고 다들 손바닥을 내게로 벌린다.

영어로 된 관광 안내판을 읽으러 자리를 옮기자 또 그네들이 따라 온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따라오고 손을 벌린다. 최부장은 바라만 호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중에 돌아가려 버스에 올라타자 최부장이 말했다. 최부장은 그 곳의 소녀들과 여러 번 만나서 안면을 튼 사이인데 버스에서 내릴 때 다가와서 흥정을 걸어 오더란다.
 
"손님들이 돈 많아 보이는데 우리 모여서 노래 한번 하면 안될까? "
 
"아니, 우리 손님들, 돈 없어 - 가난해. "
 
"아니, 부자같아 보여 -"
 
캄보디아에 도착하자 마자 보이던 많은 소녀들. 희안하게도 구걸하는 아이들은 모두 소녀였다. 소년들은 그나마 어떤 생산 활동을 하고 있거나 훗날을 위해 교육을 시키고 있는 듯도 하고 그들 생각에 별 생산적인 쓸모가 없는 소녀들만이 이 동냥 행렬에 줄을 서 있는 듯 싶었다.
 
그래서 그 날 밤 여성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도 했고. (참고:안젤리나졸리스럽던 레드피아노)
그리고 입장료를 내야 들어 올 수 있는 앙코르 와트 구역 내에선 많이 안 보였고 바리케이트가 없는 이 곳이나 왓트마이등에 있다.

보릿고개를 지나 온 세대가 아직 생존중인 우리나라. 나 어릴 때만 해도 수도물 틀자마자 온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생각 해 보면 30년 사이 이렇게 달라졌다.

캄보디아 소녀들의 표정이나 말투에선 상냥함이나 수줍음은 없다. 악만 남아 있다. 상대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는 일 따위는 없다. 자신이 할 얘기만 뱉고 자신이 얻어야 할 목적(돈)만 생각한다. 공감, 소통 따위는 이 아이들에게는 사치인 것.
 
6 25 전쟁 이후의 우리 땅의 아이들은? 미군 뒤를 쫓아 다니며 '껌- 쪼꼴렛-' 이라고 소리치던 우리의 아이들은 ? 미군 트럭 뒤를 따라 달리다가 그들이 던져주는 건빵 한 봉지에 달려들어 나누어 먹었던 그 아이들이 우리들의 부모님들이다.

저 아이들은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왜 30년 뒤가 아닌 지금 태어난 걸까?

30년 뒤의 캄보디아 아이들은 지금의 나처럼 부모 세대를 생각하며 소회에 잠기게 될까?

2.5달러짜리 캔 콜라를 사서 마시며 나는 또 1달러에 일희일비하던 그들을 떠올렸다.
소풍갈 때 병 사이다 하나와 삶은 달걀 하나로 행복해했던 우리 부모님들을 떠 떠올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 천년동안 크메르 족들의 사연을 지켜보던 바라이 호수의 물은 지금도 말없이 출렁거린다 -




왼쪽 편에 사람들이 앉아 발을 담그며 쉴 수 있는 휴식소가 보인다. 
이 호수가로 내려 오기 전, 위 쪽 공간에 휴게소들과 갖가지 기념품을 파는 코너들이 있다. 

사진이 충분치 않아 죄송할 뿐 ;;
아래의 파노라마 사진은 180도  연결 사진이다. 클릭하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