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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나들이

겨울 속 양동마을을 거닐다. 추억을 거닐다.







지난 주 - 베트남에서 돌아 온 뒤 이틀 뒤에 다시 양동마을로 갔습니다.

여독이 덜 풀리긴 했지만 짧지 않은 기간, 그것도 크리스마스와 결혼기념일을 끼고 따로 떨어져 있었던 데 대한 보충의 의미라고나 할까?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차에서 내려서니 -추운 날씨였으나 햇살은 따스했습니다.





여기가 마을 입구.

저기 아이들이 노는 곳은 웅덩이인데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살얼음은 아니리라 믿으며 .
신나게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는 모습에 잠깐 걱정을 하며 지나쳤습니다.




5 m 정도 들어서면 이런 안내소가 보입니다. 안내소 옆엔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동 마을에 대한 안내문과 지도판도 같이 -.


왼쪽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확대된 글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이미 84년도에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자료 189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이 곳은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곳은 경주 손씨(孫)와 여강이씨(李) 종가가 500여년동안 함께 살며 전통을 이어 온 반촌마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두 성씨가 함께 사는 반촌 형태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 또한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고.

아래는 홈페이지 에 안내된 설명문 중의 일부.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바로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죠.

위의 설명에 의하면 기와집이 54호이고 초가집은 110호라고 합니다.

기와집이 양반집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초가집들은 하인들의 주택이라고 하네요.

양동마을이 근래에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 곳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 으로 지정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안동 하회마을 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열 세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된 것이 바로 재작년 2010년.

이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이 84년도인데 나는 어떻게 이제서야 이 곳을 찾게 된 것일까요?

유네스코 지정으로 유명해진 것이 이유가 되겠지만 유네스코 지정이 된 근원을 들여다 보면 - 아마도 이 마을에 담겨진 시간들이 현재와 충분히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년정도가 지난 과거는 아직까지 가치를 부여하기엔 시간의 무게가 덜한 모양입니다. 이젠 주변을 둘러봐도 이런 옛스런 풍경을 찾아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이 곳이 가치를 갖고 알려지게 된게 아닐까요?




실은 - 마을로 들어 서는 이 길에서부터 제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시간을 되돌려 꼬맹이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나이 7살 때, 그리고 국민학교 1학년 때로 - 3학년 때로 - 6학년 때 - 그리고 내가 결혼한 첫 해로 -

 



길 한 켠 - 세월처럼 낙엽이 쌓여져 있습니다.

저 아래 쌓여진 흙들은 10년전 낙엽을 품고 있을테고, 20년전 낙엽도 그 세월을 함께 안고 있을 수도 -





나의 외가는 경주입니다.

경북 경주시 월성군 월성읍 함백동 오야리 -

여름방학겨울방학이면 가끔 외갓집을 갔었습니다.

버스가 내려다 주는 큰 길에서 꼬불꼬불 좁은 길을 한참 들어서면 마당이 큰 집이 나타납니다. 도시로 나가 가게를 차리고 사장님이 되었던 내 젊은 아버지는 새로 뽑은 자동차에 저를 태우고 그 좁은 길을 곡예하듯 운전하여 들어섰습니다.

마당을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엔 소가 두어 마리. 착한 눈에 여물을 먹고 있던 소들 .

마당 중앙엔 닭집 두개. 두 닭집을 연결하는 가는 나무 막대기를 능숙하게 외줄타듯 건너는 닭들이 있었습니다.

마당 왼편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고 거긴 외할아버지가 근엄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계셨습니다. 거기 외할아버지가 책을 읽고 계시다는 것은 제가 확인한 사실이 아닙니다. 거기서 그러고 계시다고 외할머니가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만 그 방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고 외할아버지와 제가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손자도 아닌 손녀, 그것도 외손녀인 제게까지 인사의 순서가 안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몸이 편찮으셔서 제가 사는 동네 근처의 큰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그 때 몇 번 찾아뵈었던 것이 더 자주 뵌 듯 하네요. 병원 퇴원하신 후로 두어 해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중앙에 있던 큰 집. 거기가 본채였습니다. 집 왼쪽편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거기 내려가면 '정지'(부엌)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솥이 네 개 정도 부뚜막에 걸려 있었고 소나무 가지들을 아궁이에 넣고 때워 밥과 국을 끓였습니다.



마당 한 켠, 겨울 내내 쓸 장작들이 쌓여져 있었고 어떤 해엔 내 키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장작들 위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손이 닿지 않은 그 장작더미 위의 눈에 손자국을 내고 싶어 침을 꼴깍거리며 올려다 봤던 기억이 납니다.

외할머니 방은 제일 큰 방이었습니다. 들어서면 내 키만한 큰 괘종 시계가 있었습니다. 30분에 댕~~ 한번 종이 울리고 매 시간마다 그 시각의 숫자만큼 종이 울렸습니다. 방문 위에는 커다란 사진 액자가 있었고 식구들의 조그만 증명사진과 흐릿한 흑백사진들이 다닥다닥 유리틀 안에 끼워져 있었습니다. 장롱말고도 큰 궤짝같은 상자농도 있었습니다.

외할머니 주무시는 방의 건넌방이 제가 자는 방이었습니다. 창호지로 바른 문 중앙에 조그맣게 유리가 덧대어져 있었습니다. 밖을 내다볼 때 쓴다고 아랫집 언니가 말해줬습니다.

- 창호지를 통해 들어 오는 햇볕은 부드러웠습니다.

밤에 불을 끄면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이라 너무 깜깜했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똑같이 칠흑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꺼내 주신 솜이불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솜이불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같고 조그만 내 몸이 땅 속으로 박혀 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이불이라 특유의 묵은 냄새도 났습니다.


이 밤은 어떻게 지나가는걸까....??

. .
일곱살의 그 마음이 지금도 엊그제인 듯 합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 마침내 어둠에 눈이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조그만 쪽유리창 밖으로 올려다 보았던 밤하늘의 수많았던 별들 - 그 때 빛났던 별들의 빛이 수십년전의 빛이었고 그 때의 빛이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그 빛일 겁니다.

아침이다 - 일어나야지~~


서른살을 겨우 넘긴 젊은 아버지가 절 깨우셨습니다.

세수는 마당 우물물을 길어줄테니 그 물로 - 손이 조금 시려울 수도 - 그리고 비눗물이 암만 헹궈도 미끈덩거릴거야. 우물물은 수돗물이랑 다르거든.


지금처럼 다정하신 아버지는 그 때도 제게 작은 것들까지 모두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두레박질을 눈여겨 봐 뒀다가 나중에 혼자 해 보려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두어 해 지나서 몇 번의 경험이 더 쌓였을 때에야 비로소 우물물을 혼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세수를 하고 나자 아버지는 그 옆 담벽의 덩쿨을 가리키며 말하셨습니다.

이건 청포도 덩쿨 - 지금은 겨울이라 덩쿨들만 있지만 - 포도가 열리면 맛이 좋단다 -


청포도 - 맑은 포도물을 상상.... 그 향을 떠올림....
몇 해 뒤에 그 청포도를 맛보다...




세수를 마치고 나면 밥을 먹으러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소고기 국이 외할머니가 준비해주신 최고의 반찬 -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소고기국은 특유의 향이 났습니다.

장작냄새가 섞인 듯한 향. 솔방울을 태운 향이 섞인 듯한 특이한 맛이었습니다. 이것말고 다른 반찬은 없나요?
라고 하니 "소고기 국이 최고지, 다른 반찬이 필요한감?" 아랫집 살던 한살 많은 언니가 대답했습니다.

할머니가 말하셨습니다. 정 반찬이 입에 안 맞으면 고추장이랑 간장을 찍어 먹으면 된다고 -

그러고는 숨겨둔 비장의 비결인 듯 숟가락을 꺼내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숟가락으로 밥을 먹은 뒤에 - 이 숟가락 뒷꼭지로 고추장을 쿡 찍어서 - 이렇게~~ 먹으면 맛나단다.

와... 신기하다... 밥 한번 먹고 고추장 한번 찍고 -





집 아래 쪽에 있던 마을 빨래터 - 개구리 잡으러 갔던 기억도 -

세째 동생, 4살 때 그 빨래터에서 개구리 잡다가 냇물에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아버지 모시러 달려갔던 기억도 -

살아 있는 개구리를 무덤 속에 넣고는 동네 꼬마들이 그 위에 올라타서 죽이며 장난질치던 모습에 엉엉 울던 기억도 -

엄마가 사 주신 분홍색 꼬마 양산이 부러웠던지 동네 꼬마들이 졸졸 따라 다니던 기억도 - 특히 인형같이 예뻤던 둘째가 양산을 들고 걷자 남자애들이 괜히 양산을 뺏어가서 내가 되찾으러 싸우러 갔던 기억도 -

재작년 암이라해서 우리를 놀래켰던 둘째는 지금 건강합니다. 세째는 올 여름 2년동안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것입니다.

저 때의 기억들을 아마도 저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동생들은 아주 어렸을 때니까요. 함께 자랐던 우리 자매들, 이제 뿔뿔히 흩어져서 자신의 가족들을 건사하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함께 잠들고 함께 눈뜨던 그 일상들은 이제 돌아 올 수 없는 어린 날의 추억이겠죠...



  

 
이것은 수령 600 년 된 나무입니다. 많이 노쇠하여 곳곳에 지팡이들로 부축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지들의 모습이 잘 균형잡혀 있어서 마치 거대한 분재와도 같았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왼쪽 설명문을 클릭하면 큰 글자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보수 공사 안내 판입니다.


감독관이 문화재과 소속이네요.

목공, 와공, 석공, 미장공등이 모두 호수가 붙어 있는 장인들이신 듯 합니다.
















외할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셨습니다.

새벽에 해도 뜨기 전 버스를 타러 큰 길로 나가셨다가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을 더 사시다가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부엌 개량의 바람이 오야리에도 불어 닥쳐 할머니네 부엌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급수사정만은 그다지 좋아 지질 않아서 자주 수도가 끊겼다고 합니다. 돌아가시던 그 날 새벽에도 할머니는 여늬 날처럼 큰 바께스 서너 개에 물을 가득 채워 두고 나가셨습니다.

해도 뜨기 전이라 사고 낸 차량이 뺑소니를 치고 도망친 뒤 외할머니는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길에 누워 계셨습니다.... 누군가가 발견해 줄 때까지..

할머님 돌아가시고 장례치른다고 오야리의 집으로 가니 부엌은 금방이라도 주인이 들어설 것처럼 정갈했습니다.
돌아 올 줄 알고 바께쓰마다 가득 가득 채워놓았던 물들이 넘실거렸습니다. 당신 장례에 손님들 치르느라 쓰일 물일 줄은 꿈에도 모르셨겠죠.

곧 먹으려고 꺼내두었던건지 반찬통에 뚜껑이 잘 닫힌 채 밥상 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당신때문이야 - 당신때문에 외롭게 돌아가셨어 -
누군가의 절규가 들리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하인 수십명이 있던 부농의 딸로 태어나셨던 외할머니.
여섯살 때부터 하인들 줄 밥이 잘 익어가나 보려고 작은 키 때문에 부뚜막 위로 뛰어 올라가 밥솥 뚜껑을 열어보았다던 외할머니.

이 이야기는 외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들려주셨던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당시 내가 살던 부산과 경주는 고속버스편도 직행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야 경주를 갈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막내임에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우리 어머니는 거의 항상 두통에 시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신기한 기적을 겪으셨다는데 -
1년에 한번 정도 친정을 갈 수 있었는데 경주행 기차를 타고 기차가 점점 경주와 가까와 지면서 거짓말처럼 두통이 없어졌었다고 .

" 진짜 신기하지??"

정말 신기한 듯 제게 얘기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셨던 이야기.

엄마의 엄마가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엄마가 내게 이야기를 전해주고 - 나는 지금 건네 줄 딸이 없어 이렇게 글을 적고 있습니다.

별이 내를 이루어 흐르듯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들 속에 점으로 찍힌 지금의 "나" 입니다. 우주 속의 "나" 입니다.





빨래터도 없어졌지만 - 그 장작때던 부엌도 없어졌지만 - 우리들 사는 인간사 수레바퀴는 여전히 돌고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 제 머리 속에만 있는 듯 했는데 잠깐 안개처럼 실사화되어 제 눈앞에서 피어났던 것이 양동 마을입니다.





아랫집 살던 언니 - 국민학교 1학년인 내가 외갓집에 가면서도 들고 갔었던 게 '방학생활' 책이었습니다.

언니는 왜 숙제 안해?? 방학 끝나갈 때 할거야??

열심히 빈 칸을 메꿔 넣던 제게 언니가 신기해하며 물었습니다.

넌 1학년 밖에 안됐는데 글자도 잘 읽네??

언니는?? 2학년인데 글자 못 읽어??

난.... 촌에 일 도운다고... 겨울에는 밀짚모자도 만들고 - 또 집에서도 할 일이 있제...

언니는 조금 철이 들자 도시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했고 난 그 소식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열일곱살 노동자 - 이후 결혼을 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고 -



60~ 70년대가 남아 있는 곳, 양동 마을입니다. 누군가의 추억을 불러 일으켜 줄 수도 있는 곳.

 



윗 마을 영철이네 집에 송아지 한 마리가 새로 태어났대요 -


아랫 마을 자야는 이번에 도시로 간다고 하네요 -

.
.

이런 얘기들이 들렸을 수도 있는 동네 -





클릭하시면 180도 파노라마 촬영된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 되시기를 -

다들 행복하시기를 -

나도 -


* 1년전 발행된 글인데 이 곳으로 자료들을 옮겨 오면서 재발행하였습니다.
아끼는 글이라 제대로 걸어 두고 싶어서 재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읽었던 글인데 또 들르시게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래의 손가락 모양 추천 버튼은 로그인없이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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