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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딸라'는 200년전 낭만주의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입니다

 
200년전 낭만주의 문학의 서막을 열었던 소설 '아딸라'


"아, 아딸라~! 야성녀 아딸라 -"

프랑스 발간본의 표지


소설 아딸라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문학시간마다 나이든 여교수님은 항상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습니다.

"꿈 속을 헤매는 느낌이지 않나요? 아주 몽환적이고 그러면서도 관능적인 - "

위의 '아, 아딸라~!' 이 부분은 정말로 감정이 푹 담긴 채로 얘기를 해서 우리 학생들은 쉬는 시간 , 교수님의 그 찬탄조를 따라하며 웃기도 했죠.

'아딸라'는 샤또브리앙 Chateaubriand:1768~1848 ) 이 1801년 ( 위키백과에 의하면 4월 1일날 출간 ) 에 최초 출간한 소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년 전의 소설이죠.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을 부흥시킨 물꼬가 된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지금 한글 번역본으로 읽어도 그리 쉽게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아직 번역본이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번역되어도 어려운 소설을 원문으로 읽자니 그 어려움이야 상상할 수 있겠죠? ;;   
 

겨울 홍수가 져 이 강들이 모두 범람하고 폭풍우가 숲을 송두리째 쓸어버리면

1851년 출간 되었던 책의 사진입니다. 약 150년전의 책이죠.

뽑힌 나무들이 강물을 뒤덮는다. 곧 진흙이 나무들을 고정시키고 리아나 덩굴이 그것들을 얽어매면 도처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잡초들이 드디어 이 잔해들을 굳힌다. 이것이 거품덩어리 파도에 밀려 미시시피로 내려간다. 강물은 이것을 휘감아 멕시코 만으로 밀고 나가 모래톱 위에 퇴적한다. 이렇게 해서 강 하구 수가 늘어난다. 강은 이따금 산 아래 계곡을 지나면서 우렁차게 포효하며 숲으로 둘러쳐진 주랑과 피라밋 모양의 인디언 무덤 주위에 물을 넘쳐 흘린다.그것은 사막을 적시는 나일 강이다. 그러나 그 은총은 항상 자연의 장려한 풍광에 모아진다. 강 한 가운데 물살이 뿌리채 뽑힌 소나무와 떡갈나무의 잔해를 바다로 이끄는 동안, 양옆 강가를 따라 흐르는 물위로 피스치아와 수련이 넘실대는 섬들이 보이고 노란 장미들은 작은 정자들처럼 물위에 솟아 있다. 초록색 뱀, 푸른 왜가리, 장미빛 홍학, 그리고 악어새끼들이 꽃으로 뒤덮인 이들 배 위에 타고 황금빛 돛에 바람을 부풀리며 미끄러져 강의 외진 어느 작은 만에 꿈꾸듯이 닿는다.


미시시피의 두 강 안이 아주 경이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서안에는 대초원이 눈에 끝없이 펼쳐지고, 초록색 물결은 점점 멀어지면서 쪽빛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더니 사라져버린다. 한없이 넓은 초원에는 3,4천 마리의 야생 물소 떼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보인다. 때로는 늙은 들소가 물살을 가르며 미시시피강의 섬으로 헤엄쳐 나와 키 큰 덤불 숲에 드러눕는다. 당신은 두 개의 초생달 모양으로 생긴 이 들소의 머리와 진흙이 잔뜩 묻은 고풍스러운 수염을 보면, 이를 거대한 물살과 물가에 펼쳐진 원시의 풍요로움에 만족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강의 신(神)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서쪽 강의 광경이다. 그러나 이 광경은 반대편 강안에서는 모양을 바꾸어 다른 편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강물에 걸려 있거나 바위와 산에 군집해 있거나 계곡에 흩어져 있는 모든 형태의 가지각색 나무들이 온갖 향기를 발하며 서로 섞이고 함께 부풀러 올라서 하늘 끝 높은 데까지 치솟아 눈을 어지럽게 한다. 야생 포도, 능소화, 콜로신트가 이들 나무 아래 서로 얽혀서 그들의 잔가지를 감고 가지 끝에 기어올라 단풍나무에서 튤립트리로, 튤립트리에서 접시꽃으로 수천의 동굴과 궁륭,회랑을 만들며 뻗어....... 조물주의 손이 이 은신처에 뿌리내리게 한 수많은 동물들이 거기에 환희의 생명을 퍼뜨린다.... 곰... 카나다 순록... 검은색 다람쥐...지빠귀와 참새처럼 오동통하게 살찐 버지니아산 비둘기들이 산딸기로 붉게 물든 잔디밭에 내려앉는다. 머리가 노란 녹색 앵무새와 붉은 부리 청딱다구리, 홍방울 불새들이 실편백 위로 빙빙 돌며 기어오른다... (...부분은 생략한 부분입니다 )

강 건너 초원에 고요와 안식이 찾아들면, 이 쪽은 반대로 만물이 움직이며 술렁이기 시작한다. 떡갈나무 기둥을 쪼아대는 새소리, 짐승이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풀을 뜯거나 이빨로 과일 씨를 깨무는 소리, 물결치는 소리, 다 꺼져가는 신음소리, 어렴풋한 울음소리, 그리고 달콤한 속삭임이 이 삭막한 대지를 원시 그대로의 부드러운 조화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산들바람이 불어와 이 고요를 깨뜨리고 모든 표류체를 뒤흔들어 흰색, 쪽빛, 초록색, 장미빛 등, 온갖 색을 섞어 혼합해서 짐승소리와 합할 때.......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 묘사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Ultimos momentos de Atala by Luis Monroy - 당시 소설 '아딸라'에 감명받은 많은 미술작품들 중 하나

여기가 초두 부분의 원시 대자연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맨 앞은 지도상 미시시피강이 어디를 통하면서 흐르는지 설명하고 있고 이 강물의 움직임을 따라 그 주변의 자연 풍광에 대한 묘사들이 이어집니다.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 미세한 자연의 소리들까지 이어집니다.

매 줄마다 처음 보는 식물의 이름과 동물의 이름들이 나오는 통에 쉴 새 없이 사전을 뒤적이던 기억이 나는군요. 청딱다구리라든가 홍방울 불새, 능소화, 콜로신트가 무엇인지 금방 알기는 힘들거든요 ;; 게다가 옛 글 특유의 장문 스타일, 관계절이 어디에 걸리는지 목적어인지 부사인지 해석하다보면 문학 자체에 빠져들 여유는 없어집니다.


원본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해석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매우 깁니다. 여유를 가지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

샥타스라는 노인이 르네라는 청년에게 자신이 젊었을 적 있었던 아딸라와의 사랑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 르네는 소설 '아딸라' 의 연작시리즈로서 다음 편의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게 됩니다  )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샥타스라는 노인은 현재 73살, 나체즈 ( Natchez ) 족장의 위치이며 여러 불행을 겪은 뒤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문명 사회에서 생활하다가 조국으로 다시 돌아간 샥타스는 또 다른 불행으로 장님이 됩니다. 1725년 르네라는 한 프랑스 청년이 샥타스에게로 와서 전사로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샥타스는 그를 양자로 삼고 인디언 처녀와 결혼시킵니다. 그리고 그 부족사람들이 비버 사냥준비에 나가게 되었을 때 하얀 달빛이 내리는 어느 밤, 카누 선미에 앉아서 샥타스는 오래 전 사랑의 이야기들을 르네에게 들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샥타스는 열일곱살 때 전투에 나갔고 아버지는 거기서 용감히 싸우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패하여 도망가다가 스페인들이 세운 도시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로페즈라는 노인과 만나게 됩니다. 이 노인의 양자로 30개월동안 도시 생활을 하게 되죠. 각 방면에서 다양하게 교육도 받습니다만, 염증을 느끼고 다시 미개생활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합니다. 미개인 옷을 걸치고 활과 화살을 들고는 인디언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고 울며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됩니다만, 가자마자 적의 부족에게 잡힙니다.

거기서 화형을 당하게 될 운명에 처합니다. 샥타스는 젊고 ( 계산상 포로되었을 때의 나이 20세 ) 지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으로 글 속에서 느껴집니다. 다가 와 말을 걸어오는 적진의 여인들은 샥타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샥타스의 텐트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바로 아딸라입니다. 아딸라의 첫 등장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무스코굴쥐인들이 숲 기슭에 야영 텐트를 친 어느 날 밤, 나는 내 감시를 맡은 사냥꾼과 함께 불가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덤불 속에서 옷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한 여인이 내 곁에 와 앉았다. 눈물이 눈 섶 아래로 흘렀다. 가슴에 드리운 금빛 십자가가 불빛에 반짝였다. 그녀는 몸매가 균형 잡혀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은 무언지 모르게 고결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그녀는 상냥하고 우아한 맵시를 지니고 있었다. 깊은 우수에 잠긴 지극한 감수성이 그녀의 눈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천상의 미소였다.

죽음을 앞둔 전쟁포로에게 위로로 주어지는 ' 마지막 사랑의 동정녀' 라고 샥타스는 여겼으나 아딸라는 그 족장의 딸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이곳을 떠나요."

나는 시마간의 딸을 대초원의 곶으로 나아가며 푸르른 만을 형성하는 작은 언덕 기슭으로 인도했다. 황야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웅대했다. 황새가 둥지에서 울고 메추라기의 단조로운 노래 소리, 앵무새의 울음, 들소의 포효, 그리고 암말 시미놀의 울음소리로 숲이 떠나갈 듯 했다.

우리들은 거의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나는 아딸라의 곁에서 걸었다. 그녀는 내가 억지로 손에 들려준 밧줄 끝을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때때로 눈물을 흘렸고, 그때마다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때로는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때로는 대지를 응시하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석양을 향해 팔을 벌리며, 심장이 번갈아 고동치다가 다시 고요해지는 가슴을 한 손으로 가볍게 안으며 우리들은 이따금 서로의 이름을 부드럽게 살며시 불렀다. 오! 첫 사랑의 산책, 불운한 여러 해를 보낸 지금에도 당신이 아직 이 늙은 샥타스의 마음을 마음을 뒤흔들다니, 당신에 대한 기억이 매우 강렬함이 분명하오!

.(중략)

.
종려나무의 나라 남국의 딸이 한 밤중에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나를 커다란 소나무 숲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도주하도록 다시 애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이 떨리는 암사슴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숲 속을 이끌고 다녔다. 밤은 매우 감미로웠다. 대기의 정령이 소나무 향이 배인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강의 타마린드 식물 아래 누운 악어들이 풍기는 용연향 냄새가 은은히 퍼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한 가운데에 달이 빛났고, 진주같은 회색 달빛이 숲의 희미한 봉우리 위에 내려 비치고 있었다. 나무들 한 가운데 저 멀리서 들리는 무언지 모를 화음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막의 광야에 외로운 영혼들이 한숨짓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몇 번, 도망을 시도하다가 잡히게 되고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습니다.

아래는 아딸라의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마치 제단에서처럼 쓰러진 늙은 소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신에게 우상 숭배자인 한 연인을 위해 맹세를 하고 있는 소박한 원시인인 순결한 아딸라, 아! 그녀는 얼마나 신성해 보이는지! 밤하늘을 향한 그녀의 눈과 신앙과 사랑의 눈물로 빛나는 그녀의 뺨은 영원히 변치 않을 불멸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듯해 보였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인디언들을 교화시키고 자비심을 호소하려했던 흔적을 다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형시키기 전에 원로회를 소집한 것이죠. 원래의 풍습으로는 화형을 함이 당연하나 기독교인들이 전파한 대로 화형보다는 순화된 형태로 노예로 둘 것인지를 의논하기 위함입니다.각각의 의견들이 오가다가 마침내 화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화형을 당하게 된 그 날 밤, 아딸라는 감시하는 이들과 화형집행인에게 술을 먹이고 샥타스를 탈출시킵니다. 길을 잘 모르는 샥타스를 위해 같이 도망의 길을 떠나게 된 아딸라. 둘은 원시림 한 가운데를 지나는데요, 이 여정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뒤쫓아 올 추적자들을 떠올리면 여유가 없지만, 샥타스는 아딸라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아딸라는 거의 벗은 샥타스에게 물푸레 나무의 속껍질로 옷을 만들어 줍니다. 사향쥐 가죽을 호저 털로 엮어서 신발에 수를 놓아주기도 하구요. 샥타스는 푸른색 접시꽃으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얹어주고 진달래의 붉은 열매로 목걸이를 만들어 주기도 -

이 사진들은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해외 사이트에서 찾아 온 것인데요 - 아주 옛날의 책의 삽화로 쓰여진 사진들 같습니다.100년전인지 150년전인지 알 수 없는 옛날 책인 듯 -

강을 만나면 뗏목을 타거나 헤엄을 쳐서 건너고 원시림을 지납니다. 저녁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이동 오두막집을 지었습니다. 야생 칠면조나 산비둘기, 산꿩을 구워 먹고 , 먹는 이끼와 자작나무 껍질, 오월 사과를 먹으며 호두나무와 단풍나무 수막으로 포도주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날짜가 지날수록 아딸라의 표정에는 근심이 더해가는데 -

아딸라는 신에게 바쳐진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 의해서 동정녀의 상태로 신을 섬기는 운명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뒷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딸라의 어머니는 지금의 족장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의 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이전에 샥타스를 양자로 삼았던 ' 로페즈 '이고 그 아기가 바로 아딸라였던 것. 즉 샥타스와 아딸라는 피로는 묶여져 있지는 않지만 남매간인 셈이죠.

아딸라의 모친은 족장에게 결혼하기 전에 이 사실을 다 밝힙니다.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지고 있으니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지만, 족장은 용서하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오누이간임을 알았음에도 애정이 너무 깊었기에 그들은 혼례의 밤을 가지게 됩니다. ( 이 부분 모호, 단지 입만 맞추고 품기만 했는지? )  그리고 다시 도망을 계속하다가 천둥번개가 치던 어느 날, 아딸라와 샥타스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오브리 신부입니다. 젊어서부터 미개 원시인들에게 포교활동을 하다가 두 손까지 잘리운 선교사입니다. 신부는 그들을 동굴 안 피신처로 데리고 갑니다. 그 근처에는 하나님에 귀의시킨 부족민들도 같이 살고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오드리 신부에 대한 묘사들은 너무 숭고해서 샤또브리앙의 신앙심이 여기에서 보이기도 합니다 )

오브리 신부는 아딸라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마을의 한 가운데에 오두막집을 마련해주고 샥타스를 기독교인으로 올바르게 가르쳐서 배우자로 손색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샥타스와 신부는 그 근처를 산책하며 갖가지 종교적 장소들을 둘러보다가 동굴 안으로 돌아오자 - 아딸라는 독약을 먹고 창백해져 있습니다.

아딸라는 느려지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자신의 운명에 숨겨진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합니다.

잉태했을 때부터 여러 불행의 씨앗으로 생겨났던 아딸라는 태어나는 순간에도 난산으로 목숨이 위태로왔습니다. 아딸라의 모친은 성모마리아에게 맹세하지요. 아딸라를 무사히 태어나게만 해 준다면 그 아이의 순결을 바치겠다고. 아딸라가 16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시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 아딸라를 불러서 다시 확인합니다. 사제와 어머니의 손을 걸고 하늘을 앞에 두고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냅니다.그걸 지키지 못할 경우 저 세상에 간 어미의 영혼을 영원한 고통에 처넣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딸라의 이야기중 한 부분 -

어머니는 내가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위협하며 기독교의 박해자인 이교도들에 대한 침해할 수 없는 비밀을 나에게 권고한 뒤 나를 껴안은 채 숨을 거두셨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 서약이 그렇게 위험한 지를 몰랐습니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열정이 가득 차서 나의 핏줄 속에 흐르는 스페인의 피에 자부심을 느낀 나는 내 주위에서 내 손을 받아줄 만큼 수치스러운 사람만을 볼 뿐이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의 신 외에 다른 반려를 가지지 않은 것을 기뻐했어요. 나는 젊고 아름다운 죄수인 그대를 보고 그대의 운명을 가엾게 여겨 숲 속 장작더미에 있던 그대에게 감히 말을 걸었지요. 그때 나는 내가 한 맹세의 막중함을 느꼈어요."


"나의 친구, 그대는 나의 투쟁의 증인이었지만 내가 그것을 숨겨왔기 때문에 그대는 극히 그 일부만을 알 뿐이요. 아니, 플로리다의 타는 듯한 모래를 땀으로 개간한 흑인 노예도 나, 아딸라보다 더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그대에게 도망가기를 간청하면서도 정작 그대가 나를 떠나 멀어지면 정말 죽을 것 같아 그대와 함께 사막을 방황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무 그늘을 찾아 헐떡거리며... 아! 부모와 친구, 조국을 등져야만 하다니, 더욱 몸서리쳐지는 것은 내 영혼의 상실뿐이니!그러나 오 나의 어머니, 그대의 그림자가 그의 고통에 대해 나를 비난하면서 여전히 거기 있었다니! (후략)


오브리 신부가 대답하죠.

종교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우리의 잘못을 지우기 위해서 인간의 눈에는 피가 강물만큼 필요하지만 신에게는 단지 한 방울의 눈물로 족하다고. 그리고 신부는 퀘백의 대주교에게 글을 올릴 것이고 단순한 서약에 지나지 않는 아딸라의 맹세를 해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반려자인 샥타스와 함께 자기 곁에서 삶을 마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가짜 죽음에서 깨어난 줄리엣처럼 아딸라가 경련으로 오래도록 말문을 열지 못하죠.

-뭐라구요? 구제의 방법이 있었다고요!

- 그래요. 지금도 늦지 않아요

- 늦었어요... 너무 늦었어요...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나는 죽어야 하다니! 어찌 내가 좀 더 빨리 이 노 사제를 알지 못했던가.. 그러면 나는 이 존엄한 사제의 위로로 안심하고... 이 사막에서... 영원히.... 독실한 기독교인 샥타스, 그대와 함께 행복을 누릴텐데...


폭풍우가 몰아칠 때 맹세를 저버리려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샥타스의 포옹에서 자신의 죽음에의 포옹을 느끼고 있었던 아딸라.

" 신부님, 제가 대죄를.... 그러나 저는 저 하나만 희생했을 뿐 어머님은 구했어요."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말하는 아딸라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마을을 떠나올 때부터 독약을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 그것은 이미 내 배 속에"

아딸라는 숨을 거두었고 이 이야기를 회상하는 노인 샥타스는 아딸라가 마지막 남기고 간 십자가를 꺼내서 르네에게 보여줍니다. 앞을 못 보는 이 노인은 거기에 스며있는 자신의 오랜 세월의 눈물이 보이지 않냐고 울먹입니다." 오, 대지여. 당신은 나를 오래도록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세월 속에 슬픔으로 백발이 된 이 머리를 사제가 다시 젊어지게 하자마자, 나는 아딸라와 다시 결합하리오."

사제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아딸라가 누워 있는 침울한 침상 머리맡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잠자는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이 사랑스러운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가! 얼마나 여러 번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호흡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기대곤 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 움직이지 않는 가슴에서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고 있지 않아, 이 미녀의 소생을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morte de Atala (아딸라의 죽음 ) Painting by Rodolpho Amoedo (1883)


The Funeral of Atala, by Girodet (1808) - 아딸라의 장례식-아딸라의 피부가 하얀 것은 그녀가 인디언과 스페인의 혼혈이기 때문 -


이외에도 검색해 보시면 아주 많은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1801년에 출간 된 소설인데 1808년에도 그림이 나왔고 50년 뒤인 1883년에도 나왔군요. 이 소설의 영향이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샤또브리앙은 아버지가 백작이신데 매우 과묵하신 분이었고 또 우수에 잠긴 어머니, 그리고 병적일 정도로 예민한 누이 사이에서 자라나서 매우 감수성이 강했다고 합니다. 샤또브리앙은 북아메리카쪽을 여행하면서 이국적인 세계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쓰게 됩니다.

소설 '아딸라'- 그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종교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의 숭고함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이면서도 그 아름다움은 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소설 자체가 시적입니다. 기독교 함양이라는 목적성을 가졌음에도 이 소설이 낭만주의 문학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은 숙명적인 사랑의 갈등과 아픔, 고뇌를 낭만적 우수라는 시적 상상력으로 인간과 자연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 중심의 성서 해석으로서 인간의 사랑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곧 신의 은총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인데, 주도 전객으로 우리는 인간의 사랑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먼저 감동받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본래 「이 작품의 목적이었던 신앙과는 달리 상상력 개발과 시적 아름다움이라는 낭만주의 정신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19세기적 세기병으로서 이유없는 슬픔이 창궐하고 있었는데 이 근원을 자아 해방을 통해 표출시킴으로써 문학에 개인적 감정의 표출이 절대 미학에 이르는 길」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 이 부분은 한국어 번역본 '새미 출판사'의 신곽균님의 책 서두에 적힌 글입니다 )

이 작품은 2백년 전의 미대륙의 원시 자연과 인디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 풍속 고증자료로서 문헌적 가치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원시 정글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게 하죠.

자, 그러면 비판적인 얘기를 한번 풀어볼까요?

샥타스는 미개인이면서 또 문명인이기도 합니다. 반문명화된 미개인이라고 하면 맞겠네요. 근원은 인디안족이나 로페즈의 양자로 잠깐 문명사회에 있다가 다시 돌아갑니다. 이후 아딸라가 죽은 이후 떠돌던 샥타스는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가고 노년에 자신의 고향인 원시림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요.

반문명화되었다는 것은 샥타스가 크리스챤화, 유럽화되어가고 있었다는 것과 동의어에 다를 바 없습니다. 두 인디언에 대해 공감하며 읽어가더라도 서구 문명에 대한 은근한 우월의식이 바탕에 있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네요.

이것들을 다 떠나서 저의 얘기 - 제 닉네임이 '아딸라'인 이유 - 1992년 첫 피씨통신을 시작하면서부터 전 이 아딸라라는 닉네임을 써 오고 있습니다. 일상에 묻혀 살면서 예전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의 추억을 이 '아딸라'에서 떠올릴 수 있어서 이 이름을 써오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겠죠.

사실 오누이간의 사랑, 신에게 바쳐진 여인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지드의 '좁은문'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쩌면 뻔한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이 죽음으로 이르다니 너무 통속적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지금와서 통속화되어 버린 상태 이전의 시작점, 원조라는 사실을 떠올려봅니다. 이미 지금처럼 뻔하게 되어 버리기 전,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시대인들에게 어떤 충격과 감동을 주었는지 우리는 짐작 해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 가다 보면 이국적인 느낌에 꿈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울창한 원시림들, 그 사이로 흐르는 강, 뗏목을 타고 영원의 시간 속을 떠내려가듯 흘러가는 그들, 어디인지도 모를 곳을 향해 정처없이 떠도는 두 남녀. 그리고, 이미 비극의 결말을 눈치채고 있는 아딸라, 세월은 흐르고 회한에 가득 차 눈물 짓는 달빛 아래 백발의 눈 먼 노인. 이 소설은 그 자체로서 특유의 에그조틱한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설 속의 삽화입니다. 저 한 구석에 막막함으로 도망치는 아딸라와 샥타스가 보이는 듯.



미시시피 강 유역의 사진을 검색해서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존 밀림 -



이 사진은 Natchez 의 현재 모습입니다. 한 공원의 모습 -200년이 지난 모습이죠.



그들이 뗏목을 타고, 혹은 직접 헤엄쳐서 건넜던 곳에는 다리가 -



아딸라는 소설 속에서 세속과 성스러움 사이에서 방황하던 여자입니다. 묘사들을 보면 몸에 배인 여왕같은 도도함이 있다고 되어 있죠. 그럼에도 샥타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괴로와하던 아딸라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여인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든가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 우유부단함을 뜻하는가 하는 얘기는 여기서 그리 적절치 않을 것 같군요. 소설적 결말일 뿐이니까요. 그저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딸라에 대한 묘사는 소설 속 자연에 대한 묘사만큼이나 아름답고 또 관능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스럽게도 -

결국 제가 닉을 아딸라로 지은 이유는 '아딸라'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입니다.  아딸라처럼 결말을 비극적으로 맺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가끔은 아딸라의 고뇌가 저의 것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가까이, 사이키델릭 음악과 쇼팽을 왔다갔다 하며 탐닉하는 제 자신을 볼 때도, 대중문화와 문학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느낄 때도 그렇습니다. 다들 그런거죠?;; 저만 그런 것이 아니구요.

세속적인 것과 고결한 것,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그 나름의 가치와 즐거움을 갖고 있습니다. 현명하게 조율할 수 있겠지요. 저와 여러분, 모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위키백과에 실린 소설 '아딸라'의 설명과 써머리를 붙이며 마치겠습니다.

(원문가기 클릭 )

 

Atala is an early novella by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first published on 12 germinal IX (2 April 1801). The work, inspired by his travels in North America, had an immense impact on early Romanticism, and went through five editions in its first year. It was adapted frequently for stage, and translated into many languages.

Along with René, it began as a discarded fragment from a long prose epic the author had composed between 1793 and 1799, Les Natchez, which would not be made public until 1826. In 1802 both Atala and René were published as part of Chateaubriand's Génie du christianisme.

 

 

The frame story: A young disillusioned Frenchman, René, has joined an Indian tribe and married a woman named Céluta. On a hunting expedition, one moonlit night, René asks Chactas, the old man who adopted him, to relate the story of his life.

At the age of seventeen, the Natchez Chactas loses his father during a battle against the Muscogees. He flees to St Augustine, Florida, where he is raised in the household of the Spaniard Lopez. After 2½ years, he sets out for home, but is captured by the Muscogees and Seminoles. The chief Simagan sentences him to be burnt in their village.

The women take pity on him during the weeks of travel, and each night bring him gifts. Atala, the half-caste Christian daughter of Simagan, tries in vain to help him escape. On arrival at Apalachucla, his bonds are loosed and he is saved from death by her intervention. They elope and roam the wilderness for 27 days before being caught in a huge storm. While they are sheltering, Atala tells Chactas that her father was Lopez, and he realises that she is the daughter of his erstwhile benefactor.

Lightning strikes a tree close by, and they run at random before hearing a church bell. Encountering a dog, they are met by its owner, Père Aubry, and he leads them through the storm to his idyllic mission. Aubry's kindness and force of personality impress Chactas greatly.


The Funeral of Atala, by Girodet (1808)

Atala falls in love with Chactas, but cannot marry him as she has taken a vow of chastity. In despair she takes poison. Aubry assumes that she is merely ill, but in the presence of Chactas she reveals what she has done, and Chactas is filled with anger until the missionary tells them that in fact Christianity permits the renunciation of vows. They tend her, but she dies, and the day after the funeral, Chactas takes Aubry's advice and leaves the mission.

In an epilogue it is revealed that Aubry was later killed by Cherokees, and that, according to Chactas's granddaughter, neither René nor the aged Chactas survived a massacre during an uprising. The full account of Chactas's wanderings after Atala's death, in Les Natchez, gives a somewhat different version of their fates.